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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슨(O. R. Avison)
에비슨은 제중원과 한국에서 서양의학 발전에 최대 공헌자다. 제중원의 중흥과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하게 한 주역이었다. 그는 영국 요크 주에서 태어났으나 가족을 따라 1866년 6세 때 캐나다 온타리오 주로 이주하였다. 토론토대학의 안정된 교수직을 그만두고 한국 선교사로 와서 헌신하고 은퇴 후에는 미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나그네 인생의 여정 속에 한국의 의학과 교유긔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청소년 시절에 약방에서 일하며 학교도 다녀 후에 토론토대학의 약대 교수로 활동하였고, 토론토대학 의대를 마친 후에는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토론토대학 YMCA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던 에비슨은 하디와 게일의 한국 선교사 파송에 참여했다. 후에 언더우드를 만나 그의 권고를 받고 교수와 의사로서의 기득권을 버리고 한국 의료선교사에 지원하여 1893년 4월에 캐나다를 떠나 부산을 거쳐 8월 말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에비슨은 내한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고종의 피부병을 치료하여 왕실의 주치의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혼자서 주치의로 활동하였다. 에비슨은 언더우드와 의료와 교육 선교에 뜻을 같이하고 협력했다. 특히 평양 지회의 동료 선교사들이 병원의 확장과 서울에 대학설립을 극구 반대할 때 상부상조했다. 그는 전술한 대로 제중원의 기틀을 바로잡고 조선 정부의 정부 병원 체제를 선교부가 주도하게 만들었다. 제중원의 학교도 정상화되어 1899년에는 해부학 교재를 만든 것을 필두로 다른 분야의 의학교과서를 만들어 의학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1900년에는 뉴욕의 선교대회에서 한국의 의료선교에 대한 연설로 세브란스의 기증을 받게 되어 병원을 신축하고 양적인 그리고 질적인 발전을 이룩해 오늘날의 세브란스병원을 이루는 데에 초석을 놓았다. 그의 부인도 간호업무를 도왔고, 병원은 물론 밖에서도 여자들에게 전도했다. 목요일 밤마다 여러 계층의 한국인들을 초청하여 한국문화를 익히며 문화교류에도 힘썼다. 그의 자녀들 가운데 3명이 한국 선교사로 봉사하였다.
어빈(C. H. Irvin)
어빈은 북장로교 선교부 파송을 받아 1893년 11월 말 에비슨의 병원 확장 계획에 따라 부인과 함께 임명되어온 첫 의사였다. 제중원에서 에비슨을 돕다가 부산에서 활동하던 브라운이 병으로 귀국하자 부산 지방으로 전임되었다. 그는 부산에서 활동하는 동안 나병 환자 선교를 개척하였다.
화이팅(Georgiana Whiting)
그녀는 매사추세츠 주 몬슨에서 태어났고, 그곳의 몬슨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이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학생 선교자원 운동의 진원지인 노스필드 신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여자의대를 좋업하였다. 의대 재학 중에 선교사를 지망하여 제중원에 간호사로 오는 제이콥슨과 함께 1894년 4월 6일에 내한하였다. 제중원에서 영어와 생리학을 가르쳤고, 재정책임자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한국어 선생은 이승만이었다. 1900년에는 남장로교 선교회의 오웬과 결혼하고 남장로교로 이적하면서 제중원도 사임하였다. 광주 수피아 여자 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피시(Mary Alice Fish)
피시는 네바다 주 버지니아시티에서 출생하였다. 그 가문은 5대에 걸친 장로교 목사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장로였으며, 어머니는 청교도 가문 출신이었다. 산타로사신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여자의대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쿠퍼 의대를 졸업하였다. 필라델피아 병원에서 인턴을 마치고 무디 성경학교와 스코필드 성경학교를 마쳤다. 피시는 1897년 11월 제중원에 부임한 후, 평양으로 전임되었다가 1899년 모펫과 결혼하였다. 평양에서 1904년에 맹인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질에 걸려 1912년 7월 12일에 당시 나이 42세로 세상을 떠났다.